아름다운 황혼 인생

삼하 19:33-35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왕궁을 아들에게 내어주고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다윗은 신복 600명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을 거쳐, 여리고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북쪽 마하나임으로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왕궁을 떠나 감람산으로 올라갈 때 다윗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풀어 가리고 맨발로 울면서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올라가니라.” (삼하15:30) 아들의 배신 때문에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예루살렘을 떠났을지 상상이 됩니다.

    반란이 갑작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다윗은 충분한 양식을 챙기지 못한 채 왕궁을 황급히 떠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돕는 조력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들 중 한 사람을 보려고 합니다. [바르실래]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요단강 건너편에 거주하는 암몬 족속이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곳은 마하나임이었습니다. 옛날에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났던 곳입니다. 마하나임은 광야가 아니었습니다. 요단강과 마하나임 사이에 광활한 광야가 있었지만, 마하나임은 울창한 숲으로 쌓인 에덴과 같은 땅이었습니다. 바르실래는 그 마하나임에서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삼하19:32)

    그 바르실래가 다윗이 기진맥진해서 걷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을 위해서 [이동식 침대]를 만들어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위한 밥그릇까지 챙겨서 나왔고,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치즈까지 가득 챙겨서 나왔습니다. (삼하17:28-29) 엄마가 1년 동안 농사지은 것들을 탈탈 털어서 바리바리 아낌없이 챙겨 친정에 왔다가 돌아가는 딸에게 한 보따리 싸서 보내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바르실래는 과거에 다윗과 깊은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가지고 왔던 물품 중에서 “볶은 곡식과 볶은 녹두”가 눈에 들어옵니다. 밭에서 추수해서 가마니에 그냥 담은 곡식이 아니라, 추수한 곡식을 볶아서 만든 즉 특별한 음식 재료로 만들어서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바르실래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눈물겨운 섬김이었습니다. 후에 압살롬이 처단되고,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다윗이 바르실래를 불렀습니다. “이제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너는 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자. 이제는 내가 너를 섬기리라.”(삼하19:33) 그때 바르실래가 대답했습니다. “왕이여, 어찌 제가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리이까? 내 나이가 이제 80세입니다. 귀도 들리지 않고, 음식의 맛도 알 수 없는 노인입니다. 저의 소임은 여기까지 였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삼하19:35) 그래서 다윗은 요단강에서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빌어주고 헤어졌습니다.

    바르실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먼 훗날, 다윗이 죽게 되었을 때, 다윗은 바르실래의 이름을 다시 호출했습니다. 바르실래는 이미 죽은 뒤였지만, 다윗은 결코 그 은인을 잊을 수가 없었기에 그의 후손에게라도 복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에 대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너는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왕상2:7) 이것은 다윗과 바르실래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였습니다.

    다윗과 바르실래. 저는 오늘 그 두 노인이 남긴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에 초점을 두고 오늘 말씀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바르실래가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왕이시여, 저는 왕에게 무엇인가를 바라고 왕을 섬겼던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해야만 했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더 평안한 노후를 얻을 수 있었지만, 바르실래는 마하나임 숲속에 남았습니다.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욕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임종을 앞두고 희미해지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잊을 수 없었던 그 이름을 불러냈던 것입니다. [나의 은인, 바르실래!] 두 노인의 황혼 인생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 집회를 인도하면서 여러 교회에서 많은 어르신을 보았습니다. 교회에는 젊은이들보다 노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40년, 50년 전에 미국으로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40년, 50년 전 그 어른들이 미국에 왔을 때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분들이 받았던 1불에는 피가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동양인, 한국인이라고 업신여김을 받으며 가장 낮은 신분으로, 가장 힘든 일들을 도맡아 매일매일 고된 노동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사셨을 것입니다. 미국의 한인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교회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미국이 부자 나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의 한인교회들이 그처럼 웅장하게 미국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르신들의 피와 땀을 바친 헌신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미주 선교 집회를 인도하면서 제 눈에 들어왔던 그 모든 어르신들이 모두 [바르실래]로 보였습니다. 바르실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뒷일을 생각하고, 대국의 왕에게 무조건 복종부터 해 놓고 훗날을 기약해 보자는 식으로 미리 선행을 심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하고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졌던 겸손한 조연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미주 선교 집회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샌프란시스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 귀에 이 동요가 들리고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허리가 깊이 굽어 계시는 그 어르신들을 모시고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고 싶지만, 그 어르신들은 “저는 여기 타향에 남겠습니다.”라고 하십니다. 바르실래처럼 말입니다. 미국 한인교회들을 세워주신 그 어르신들을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신 모든 미주의 어르신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다윗이 패잔병처럼 머리를 풀고 힘없이 마하나임으로 들어올 때 바르실래는 최선의 것을 준비해서 다윗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바르실래는 다윗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나설 때와 빠질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지혜자 바르실래처럼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참 좋겠습니다.